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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빈

도(道),허(虛),깨달음

삼원회 2015.08.06 18:02 조회 수 : 1073

도는 깨달음이다. 1부에서 이미 깨달음은 허(虛)에 있으며, 수행으로 정기신을 충분히 길러 마음이 허(虛)로 돌아가면 신의 밝은 빛이 허(虛)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이제 수행의 단계를 모두 설명하였으니 여기에 맞추어 다시 한번 도(道)와 허(虛) 그리고 깨달음 대하여 마무리 정리를 해보기로 하자. 이 세 가지는 실은 하나이지만 편의상 나누어서 설명을 해 보자.

 

도(道)

석가는 ‘일단 법(法)을 말하면 그 것은 곧 법(法)이 아니므로 말할 법(法)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마지막에는 ‘나는 일생동안 법(法)을 말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설법을 하고 나서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이 두 문장은 모두 법(法)에 대한 설명이다.

다시 말해서, 법(法)은 말(언어)이나 글로 표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하여 마음으로 깨닫는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 법(法)’이라고 하는 법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왜냐 하면 법(法)은 공(空)한 것이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한 ‘도(道)를 도(道)라고 하면 그것은 곧 도(道)가 아니다’ 와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라고 1부에서도 설명했다.

위의 두 문장은 법무정법(法无定法)과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이다.
흔히 정법(定法)과 상도(常道)라는 단어의 뜻에 집착하여 法(법)≠定法(정법), 道(도)≠常道(상도) 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그러나 法(법)과 定法(정법)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며 道(도)와 常道(상도)가 달리 있는 것도 아니다.

수행을 해온 사람으로서 해석하는 위의 두 문장은 法(법)=定法(정법), 道(도)=常道(상도) 이며 다만 可道(가도)≠常道(상도)(말이나 글로 설명되는 法(법)≠定法(정법))가 된다. 도는 말로 할 수 없고 마음으로 스스로 깨치는 길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도 혹은 법의 묘용(妙用)이다.

도(道=法[법])는 완벽하게 텅 빈 것이(虛,空) 본질이다. 도(道=法[법])의 실체가 텅 비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미 존재하는 말이나 글로 어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오직 수행(修行)을 통하여 마음을 비워 깊이 허(虛=空[공])의 단계에까지 이르면 자연히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수행을 스승이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승은 도(法)를 직접 말이나 글로 가르칠 수는 없고, 다만 가는 길과 방법을 일러 줄 수 있을 뿐이다. 도(道) 혹은 법(法)은 수행자가 스스로 수행을 통하여 터득하는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래서 말할 법(法)이 없고 도(道)를 말로 하면 도(道)가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석가는 일생동안 법(法)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석가가 일생동안 말한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 것은 법(法)의 작용을 말한 것이다. 도의 작용에 대해서는 편의상 허(虛)를 먼저 설명하고 난 후에 설명하기로 하자.

 

허(虛)

허(虛)란 무엇인가?
도덕경 찬현(贊玄)편에서 도의 허(虛)함은 ‘볼 수도 없으며(이夷), 소리도 없으며(희希), 만질 수도 없는(미微) 무물(無物)의 형상이라 분간하기 어렵다(황홀恍惚)’고 하였다.

허심(虛心) 편에서는 분간하기 어려운(황홀恍惚) 가운데에 도가 있고, 고요하고 아득한(요명窈冥) 가운데에 정(精)이 있다고 하였다. 요명(窈冥)과 황홀(恍惚)은 허(虛)로 들어가 도에 이르는 진정한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용호비결에서는 내가 육신에 깃들어 있는지 육신이 내게 깃들어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 즉, 요명과 황홀을 강조하여 ‘요요명명(窈窈冥冥)’ ‘황황홀홀(恍恍惚惚)’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또한 태극이 갈리기 이전의 경지에 있는 것 같은(已在於太極未判之前矣) 상태만이 참된 경계라고 하였다. 모두 허(虛)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허(虛)는 입정(入定)을 뜻한다.
무호흡지식이 시작되면 비로소 허(虛)로 들어가는 것이며, 이를 입정(入定)이라고 한다. 입정(入定)의 상태에서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허(虛)는 도(道)의 본질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이란 ?

먼저 쉬운 말로 설명해 보자 ‘도통(道通)했다’고 할 때 통(通)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통한다는 것은 막혔던 수도관이 뚫리듯이 관의 내부가 비워지는 것이다. 수도관이 비워져 있어야 물이 통과하듯이 번뇌와 망상으로 가득한 마음에는 도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 백지이어야 글을 쓸 수 있듯이 마음을 텅 비워야 도가 마음으로 들어와 깨달을 수 있다. 깨달았다거나 도통했다는 것은 마음을 텅 비웠다는 말이 된다.

위에서 마음으로만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어떤 방법으로 깨달을 수가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마음을 허(虛-空)의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왜 허(虛)로 만들어야 하는가? 그것은 깨달음이라는 도(道-法)의 근본이 허(虛-空)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허(虛)가 되었다 하더라도 내 마음 자체는 도(道)가 아니지 않은가? 내 마음과 도를 연결시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현빈이다.

내 마음을 허(虛)로 만들면 내 마음과 하늘의 현빈이 서로 응하여 하늘의 도가 내 마음에 스며들게 되는데, 그것이 곧 도(道)이고 깨달음이다. 부처(法, 道, 깨달음)가 마음에 있다고는 하나 마음이 허(虛)에 이르러 현빈으로 하늘과 연결되기 전에는 마음에 부처는 없다. 단지 부처와 연결될 수 있는 희박한 가능성만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깨닫는다는 말인가?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생(生)이 있으므로 사(死)가 있듯이 도가 있으면 도의 작용이 있다.

그런데 도는 완벽하게 비어 있으므로 그 묘한 작용은 지극하고 무한하다. 그래서 도의 작용을 묘용(妙用)이라고 한다. 앞에서 석가는 법을 말하지 않고 법의 작용을 설법하였다고 하였다. 도는 텅 비었기 때문에 그 작용이 무한한 것이며,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은 무한한 도의 작용이다. 즉 깨닫는 대상은 도가 만유(萬有)에 작용하는 묘용(妙用)의 이치를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도가 작용하는 이치 즉, 만유의 이치는 인과의 법칙이다. 이것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 불변의 영원한 법이다. 우주의 행성이 일정한 법칙대로 운행하듯이(오행五行) 또한 사계절이 일정한 법칙대로 순환하듯이(사상四象) 영원불멸의 정해진 법(이치)이다.

이에 따라 인과가 있으니 만유는 우연이 없고 필연만이 있다. 이것은 비단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우주의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을 마음으로 완벽하게 알게 되는 것이 궁극의 깨달음이고 해탈이다.

모든 것을 깨달아서 알게 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모든 것이 달라진다. 나도 달라지고 세상도 달라진다.
그리하여 세상과 내가 하나가 되어 모든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고 영원하고도 참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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