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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 문답

단학에 대하여?

현도학회 2004.12.13 13:37 조회 수 : 1698

제목 : [질문]단학에 대하여?
이름 : 류은경(coldeye@hanmail.net)
등록일 : 2002년 09월 10일    조회수 :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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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동양의 여러가지 철학 사상에 관심이 두루 많아 여기저기 홈페이지나 책을 두루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단학에도 관심은 많지만 아직은 게으른 탓에 관심만 많고 수행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관심은 많아서 단학선원이나 국선도 한단회 연정원 등 많은 홈페이지를 두루 다니며 글동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군데를 다니다 보니 의문점이 하나 생겼습니다.



대체 단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학(丹學)하면 분명히 하나의 학문의 한분야인 듯한데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각기 제각각이고 어디에 가면 이건 도저히 학문이라 말하기에는 체계도 없고 중구난방인곳도 많은걸로 보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단전호흡으로 건강이나 증진시키고 무슨 초능력이나 개발하는 것이 단학인듯이 말하고 있는 곳도 있는 가 하면 몸풀기 체조나 하면서 도인법이다 머다 하며 단학을 말하는 곳도 보았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이곳의 홈페이지를 즐겨찾고 마음에 드는 곳이라서 여기에 질문을 올려 봅니다.

단전호흡이 단학인지 몸풀기 체조나 하는 것이 단학인지 과연 단학이 무엇인지요?



그리고 또한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것이 있는데 이곳 홈페이지를 읽어보니 수행중에는 현상이라는 것이 나타나기도 한다고 하는데 제가 둘러본곳중에 한단회의 게시판에 답변을 주로 하시는 분이 만든 홈페이지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의 게시판

http://www.kimdukje.pe.kr/technote/main.cgi?board=kim4

에 삼원학회에 대한 어떤 사람의 질문에 대한 답변중 현상이 보이면 실패다 하는 말을 보았습니다.

이런말은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죄송합니다만 또한가지만 더 하겠습니다.
http://www.kimdukje.pe.kr/technote/main.cgi?board=kim4



위에 게시판에서는 호흡의 길이가 중요하지 않다고 나와 있는데 이곳 삼원학회의 홈페이지에서는 호흡의 길이를 중요시하는 것 같은데 이것은 어떻게 보시는 지요?




더불어 위의 게시판에서 삼매에 대해서 나온내용중에


"하단전의 약을 잡고 한없이 삼매에 빠져야 하거늘 어떤 다른 현상이 나타나면
상에 떨어진 것입니다."

라는 내용이 있는데 제가 생각하건데 삼매하면 입정과 같은 것 같은데 백회가 열리지 않고도 삼매에 빠진다는 것이 가능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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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58
제목 : 답글 ] 단학과 삼매三昧에 대하여
이름 : 삼원학회()
등록일 : 2002년 09월 11일    조회수 :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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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學이란?

단학이란 용어는 이능화(李能和)의 저서 <조선도교사>에서 단학파·단파·단학 등의 말을 사용하면서부터 차츰 일반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조식(調息)이란 용어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단학이란 논리적인 학문이나 사상체계가 아닙니다. 단학은 머리로 이해하는 공부가 아니며 마음으로 깨닫는 공부입니다. 폐기를 통하여 정기신(精氣神)을 길러서 道(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정신공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는 법무정법(法無正法),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는 문장처럼 - 본 홈페이지에 자세한 설명이 있음 - 배워서 되는 공부도 아니며 이해한다고 아는 것도 아닙니다. 수행을 통하여 현로를 가서 마음으로 저절로 깨달아 아는 공부입니다. 미리 알 수도 없으며 스스로 가 보아야만 알게 되는 공부입니다.

따라서 학문적인 체계나 논리가 필요한 공부가 아니라 올바른 방법대로 수행한 만큼 가서 얻게 되는 공부입니다. 중요한 것은 수행이며 이해나 학술적인 체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학을 가르친다는 단체마다 각기 다른 것을 가르치며 왈시왈비(曰是曰非)하여 그들과 시비是非를 가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굳이 질문이 있기에 우리의 말을 하겠습니다. 근래에 들어 단학이 초능력이나 기치료 등등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 조상이 물려준 단학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 능력을 얻고자 하는 공부는 아닙니다.

석가 노자 공자가 깨달아 안 것을 알기 위해 하는 수행의 공부입니다. 옛 성현들이 알아낸 진리는 말로서 가르치거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하여 스스로가 마음으로 깨우치는 도리 외에는 방법이 없는데 우리의 조상이 물려준 조식법이 우리민족의 수행법이며 조선 말기부터 단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던 것입니다.


삼매三昧에 대하여

우리가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리고 어떤 일에 몰두하였을 때 三昧에 들었다고 하지만 三昧라는 한자의 어느 글자에서도 몰두한다는 뜻은 없습니다. 그런데 三昧는 몰두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유래가 道에 있기 때문입니다.

'三昧에 든다'고 할 때에 三昧는 삼태극이며, 도덕경의 현빈玄牝이며, 반야심경의 반야바라밀다이며, 민속설화에 나오는 삼신할미(단학요강에서 자세히 설명)입니다. 따라서 三昧에 든다함은 현빈(삼태극)에 든다는 말과 같은 말이 됩니다. 왜 그런가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三;  3
昧; 새벽 매, 어두울 매

昧는 새벽에 동트기 전에 어둑어둑하고 컴컴한 상태를 의미하는 글자입니다. 새벽은 밤과 낮의 경계로서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면서 밤과 낮을 포괄하게 됩니다. 즉 昧가 상징하는 것은 밝음과 어두움의 경계입니다.

色과 空의 경계, 유야무야有耶無耶한 有와 無의 경계, 용호비결에서 말하는 태극이 갈리기 이전의 경지에 있는 것 같은 경계(已在於太極未判之前矣)는 모두 하나의 경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경계'는 정신수행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수행의 목표가 다름 아닌 有의 세계에서 마음을 비워 바로 이 경계에 들어 無를 경험하며 有와 無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고 깨닫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밝음과 어두움의 경계를 상징하는 昧라는 글자 앞에 三이라는 글자를 붙인 이유는 현빈이 삼태극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입정에 들어 삼태극에 들어간다는 표현을 三昧에 들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三昧가 경계이기 때문에 三昧境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삼매와 입정과 참선과 무호흡지식은 다른 말이 아니라 모두 같은 경계를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입정이 어떠한 경계를 이르는지는 이미 앞의 질문에서 답한 바 있으니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No. 50답변) 따라서 삼매의 경지는 현빈일규를 이루기 전에는 체험할 수 없는데도 삼매라는 용어가 함부로 남용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수행 중에 마음을 완전히 비워 자신의 존재도 잊을 정도의 몰입이 三昧가 아니며 三昧는 이 보다 훨씬 나아가서 현빈일규를 이룬 후에 드는 입정상태를 三昧에 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現象에 대하여

현상은 일시적으로 마음이 완전히 비워지고 정신통일이 이루어지면 나타나는 상으로 현상을 한번도 보지 못하였다면 한번도 마음을 비워보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현상은 소주천 말기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 현상 중에는 별 의미 없는 것도 있지만 그 현상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되는 현상이 있습니다.

스승 없이 혼자서 수행할 수 있는 것도 현상을 보면서 스스로 가야할 길을 알아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할진대 현상을 일률적으로 모두 상으로 치부해서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더욱이 삼매에 들게 되면 현상은 자연히 나오게 되는데 현상이 나오면 삼매에 들 수 없다는 말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됩니다. 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三昧가 무엇이고 現象이 무엇인지 그 의미도 모른다고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 되며 그들은 정신수행이 아닌 다른 것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실제 정신수행이 아닌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나 여기저기 책에서 본 내용들을 가지고 자기가 그런듯이 말하며 입으로 수행의 길을 가는 구두선자들인것 같습니다.
초행자들이 이러한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어 일생을 망치고 진정한 수행의 길로 한치도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 이러한 사람들이니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지식止息과의 구분

그리고 지식止息으로 수행을 하여도 현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식은 강한 힘을 얻기 위하여 하는 호흡법이며 부드럽고 순하게 하는 조식調息은 정신적인 밝음을 얻기 위한 공부로 그 가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호흡의 길이에 대하여

호흡의 길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도 있지만 호흡의 길이는 이 공부가 얼마만큼 갔는가를 말해주는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소주천을 거쳐 대주천으로 진행을 하면서 연령이나 체력조건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각 단계마다 호흡의 길이는 대개 비슷합니다.

인위적으로 길게 늘여서 하는 호흡의 길이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수행이 발전하여 자연히 길어진 호흡의 길이는 수행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호흡의 길이를 늘이는 것이 수행의 목표는 아니지만 수행으로 쌓은 공효의 결과가 호흡의 길이로서 나타나므로 중요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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