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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천

삼시충(三尸蟲)

삼원회 2015.08.06 16:49 조회 수 : 7736

인간은 본래 선한 본성을 타고 태어났다. 그런데 인간의 몸 속에 기생충처럼 서식하고 있는 삼시충이라는 벌레가 온갖 욕망을 부추겨, 인간으로 하여금 악업(惡業)을 짓도록 하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이 죄를 지어 쌓게 되는 업(業)을 먹이로 해서 사는 벌레들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항상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충동질을 하는 것이다. 삼시충을 몸에서 제거해야 비로소 인간은 죄를 짓고 싶은 충동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이다.

상충(上蟲), 중충(中蟲), 하충(下蟲)의 세 가지의 충(蟲)이 있으므로 삼시충이라고 한다.

대주천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이 세가지 충이 차례로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게 되는데, 수행자 스스로가 확인할 수 있다.

삼시충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순서는 대주천이 시작되기 직전에 하충이 먼저 빠져나가고 현빈일규가 일어나기 직전에 상충이 다음으로 빠져나간다. 마지막으로 대주천이 완성되기 직전에 중충이 몸에서 빠져나가게 된다.

 

 

하충(下蟲)


하충(下蟲)은 그 색깔이 희게도 보이고 검게도 보인다. 모양은 누에를 닮았으며 크기는 어른의 가운데 손가락보다 약간 크며 평소 하체에 머물러 있다. 대주천 들어가기 시작하면 하충은 단전에서 출발해서 임맥으로 밀려오는 기(氣)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하체의 수많은 땀구멍과 모공을 통하여 제각기 빠져나가 어디론가 사라진다.

 

 

상충(上蟲)


상충(上蟲)은 평소 머리에 머물고 있으며 노란 새의 모양이므로 황조(黃鳥)라고도 한다. 현빈일규(玄牝一竅)가 있기 직전 즉 기가 백회를 통과하기 직전에 역시 밀려오는 기(氣)의 압력을 못견디고 내 몸에서 빠져나가게 된다.

황조가 머리에서 빠져 나오고 나면 그 몸통이 부풀려 지는데, 그 키는 어른의 키와 비슷하며 몸통은 어른의 한아름 정도 된다.

몸에서 빠진 상충은 나의 주변을 배회하며 다시 들어오려고 기회를 엿보는데, 근엄하게 응시를 하면 다시 들어오지 못하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만약 다시 들어오는 일이 생기게 되면 수행은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하고 현빈일규를 얻을 수 없게 되어 지금까지의 고생한 보람을 얻지 못하니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충(中蟲)


중충(中蟲)은 모양이 뱀과 같고 색깔은 거무스레한 구렁이와 흡사하다. 두 마리가 있으며 한 마리는 머리를 심장에 꽂고 꼬리는 단전에 두고 있으며 다른 한 마리는 반대로 머리를 단전에 두고 꼬리는 심장에 꽂고 있다. 두 마리가 서로 엇갈려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데 그 모습은 마치 태극의 모양과 같다.

머리를 심장에 꽂고 있는 충이 먼저 인간의 사악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면 머리를 단전에 두고 있는 충은 행동을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인간은 본시 하늘로부터 선한 마음을 받았다. 그러나 이 중충이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동시에 조종하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중충은 삼시충 중에서도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므로 무거울 중(重)자를 써서 중충(重蟲)이라 해야 할 것도 같으나 일반적으로 중충(中蟲)이라 쓰고 있다.

인간이 선한 행동을 하였다면 본시 하늘로부터 받은 성품을 따른 것이고, 악한 행동을 하였다면 삼시충의 조종을 받은 것이다.

대주천이 완성되기 직전에 중충은 견디지 못하고 몸에서 빠져나가게 되는데, 빠지고 나면 용의 모습으로 변한다.

이 때 몸에서 나온 중충은 멀리 가지 않고 수행자의 주위를 빙빙 맴돌게 된다. 여기서 멀리 쫓아 보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행자가 방심한 틈을 타서 다시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몸 속에 들어오면 다시는 떠나 보낼 수 없으며, 수행자는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보내는 방법은 이 충을 향하여 ‘이 놈, 나는 이제 하늘로 올라가야 하니 너는 여기서 머뭇거리지 말고 어서 내 앞에서 사라져 네 갈 길로 가거라’ 하고 호되게 꾸짖으면 중충은 그 길로 사라지고 다시 오지 않는다.


삼시충이 몸에 다시 들어오는 이유는 내 마음에 탐욕이나 삿된 시기심 등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고 마음 한구석에 이러한 욕심들이 일어날 수 있는 근원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욕심을 다 버리지 못한 상태에서는 삼시충을 향하여 아무리 호통을 쳐도 다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기를 임독맥으로 운행시킴에 있어서 기가 충분히 축적되어 자연히 운행된 것이 아니고 힘을 가하여 인위적으로 운행시켰거나 혹은 단약(丹藥)에 의존하여 기의 운행을 촉진시켰다면 삼시충을 볼 수 없다. 그것은 수행을 통하여 충분하게 길러진 정(精)과 기(氣)와 신(神)의 합일체의 힘이 아니면 삼시충은 물리칠 수가 없기 때문이며, 도정道程의 한 경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할 수도 없다. 단약을 복용하여 수행에 정진하는 힘을 얻는 것은 좋으나 단지 삼시충을 쫒기위하여 약을 썼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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